제 4 호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USSR) :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서로 다른 개혁-개방(페레스트로이카-글라스노스트) 정책의 결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USSR) :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서로 다른 개혁-개방(페레스트로이카-글라스노스트) 정책의 결과
정기자 201710846@sangmyung.kr 임 지 혁
“페레스트로이카는 민주주의적 방법에 의해, 인민에 의해, 인민을 위해 실현되는 완전한 혁명적 과정이다.”
1990년에 출간된 자하 교지 23호에서는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перестро?йка, 개혁)에 대한 특집 기사가 실렸다. 이는 당시 소련의 개혁, 개방 정책에 대해서 다룬 것이었다. 아직 소련이 해체되기 이전, 소련의 마지막 서기장이자 대통령이었던 고르바초프는 소련을 개혁하며 그 체질을 개선하는 과정을 밟아가고 있었다. 기사는 그 말미에 ‘페레스트로이카의 결론은 고르바초프의 실천의 결과에 있을 것’이라며 마무리를 지었는데 과연 실천의 결과에 따른 것일까, 아니면 저자가 예상하지 못했을 결과인 것일까, 그리고서 몇 년 뒤에 소련은 완전히 분해되었다. 소비에트 공화국들의 연방은 이제 러시아,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등 십 수개의 나라로 쪼개졌다.
러시아는 유럽에 속할까, 아니면 아시아1에 속할까? 아마 다들 먼 옛날 언젯적에는 세계지도 위에 광활하게 펼쳐진 러시아의 지도를 보고는 이런 의문을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생각해보자. 러시아는 유럽일까 아니면 아시아일까? 일반적으로는 러시아 서쪽에 위치한 우랄산맥을 경계로 하여서 그 왼쪽은 유럽, 그 오른쪽은 아시아로 구분한다는 지리학적인 답변을 듣고는 흡족하게 간식을 먹으러 떠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객관적인 정답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어린 아이가 심사숙고 끝에 던졌을 저 의문은 소련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매우 좋은 질문 가운데 하나이다. 러시아는, 혹은 소련은, 그리고 그 구성국들은 유럽 문화에 속하였을까 아니면 아시아 문화에 속하였을까?
그 중요한 논제에 대해서 살펴보기 위해서 그 곳의 사람들의 역사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먼 옛날 지금의 우크라이나 부근에 살던 사람들은 키예프(현 우크라이나 키이우)를 중심으로 국가를 만들고, 주변 세력들, 특히 동로마와 많은 접점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은 당초 로마에게 ‘비스와강의 웨네티 종족(Vistula Veneti)’이라고 불리면서 이민족 취급을 받았지만 점차 세력을 키우면서 동로마제국과 사돈 관계를 맺기에 이른다. 이 때의 인연은 지금까지 이어져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정교회(동방교회)를 믿고, 동로마의 문양에서 차용한 쌍두 독수리 문장은 오늘날 러시아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렇게 동로마, 즉 동방의 기독교 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이들은 동방(Oriental)의 정체성을 간직한 채 13세기에는 모스크바로 중심지를 옮긴다.2 이렇게 건설된 나라를 모스크바 공국이라고 부르는데, 이 도시는 머지않아 동로마의 뒤를 이은 동방 세계의 중심지가 되었다.
소련의 중심을 이루는 도시는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두 곳이었다. 모스크바는 소비에트 연방의 중심지였고,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옛날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다. 모스크바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원래 동방의 정체성을 간직한 채 건설한 도시였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다소 다른 맥락 속에서 형성되었다. 이는 곧 그들의 서구성을 대표하는 곳이다. 1682년 러시아의 황제인 차르에 즉위한 표트르 1세는 러시아의 근대화, 서구화를 제창하면서 통치 체계를 개편하고, 문자와 생활 양식, 그리고 심지어는 수염 길이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문물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1708년에는 마찬가지로 차르가 주도하여서 원래 늪지대였던 곳에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는데 그는 새로운 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서구화의 상징적인 도시임과 동시에 러시아 제국의 새로운 수도가 되기를 원했다. 마침내 1713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완전히 수도를 옮기었고, 러시아는 이제 당당히 서구의 일원이 되었다.
다시 한번 처음에 던졌던 질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도록 하자. 러시아는 유럽일까, 아니면 아시아일까? 러시아는 처음에는 동방으로서의 정체성, 즉 아시아의 정체성을 가지고 국가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점차 제국으로 발전하면서 서방으로서의 정체성을 필요로 했고, 결국 유럽의 정체성을 추구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의 근대화는 완벽하지 않았던 것 같다. 가령 프랑스가 1318년에 실시한 농노해방령은 러시아에서는 1861년에야 발표되며 550여년이나 늦게야 농노제를 폐지한다. 차르는 유럽의 일원이 되고자 하였지만 그 구성원들은 지위의 높고 낮음을 불문하고 자신의 고유적인 정체성과 혼란을 겪었다.
1917년의 러시아혁명은 이러한 혼란을 봉합한 시도로서 평가할 수 있다. 공산주의의 초기 이념 가운데 하나인 인터내셔널(국제주의)은 민족이나 국가를 초월한 국제적인 연대를 강조하면서 공산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했다. 다시말해 동방도 서방도 아닌 새로운 그들만의 가치관을 선보인 것이다. 그리고 1941년에 2차세계대전, 혹은 대조국전쟁을 겪으면서 마침내 동구권이라는 정체성을 정립했다. 그러나 동구권의 정체성은 영원할 수 없었다. 쿠바 미사일 위기 등 그들과 대척점에 선 서구권과 매우 큰 갈등을 빚기도 했고,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 소련의 정책적 실패는 동구권 그 자체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졌다. 페레스트로이카는 결론적으로 이러한 한계점들을 해소하고 동시에 그들의 새로운 정체성을 규정하기 위한 시도였다. 고르바초프는 개혁 과정을 통해서 소련에 서구권의 기본 이념들-가령 정보의 공개성, 시장경제의 도입, 민주화 등-을 소련에 보급하려 했으며 이는 서방과 동방, 서구와 동구의 흑백 논리에서 벗어나 그 중용을 찾고자 하는 시도로 평가할 수 있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는 결국 실패했고 이제는 소련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서구와 동구의 구분은 이제 사라졌고, 대신 서방과 동방의 대립 구도가 다시 세상에 펼쳐졌다. 그리고 옛 소련을 구성하는 두 개의 주요한 축이었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그 대립구도에 위치한다.
먼저 우크라이나는 서방의 길을 선택했다. 우크라이나는 2013년 유로마이단 혁명이후 NATO나 EU 등 서방과 경제적, 군사적, 정치적 협력을 강화해 나갔다. 반면 러시아는 동방의 국가가 되었다.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의 친 서방 정책이 러시아의 이익에 반대된다고 판단하여서 지난 2014년 우크라이나의 영토인 크림반도를 병합했다. 이후로도 우크라이나의 내전에 간섭하고, 2022년 2월부터는 특수군사작전을 선포하며 우크라이나를 본격적으로 침략하기 시작했다.
지금으로서는 그 전쟁의 결과가 어떻게 될 지를 예측하기는 힘들지만 전쟁이 끝난 이후에 대해서는 비교적 쉽게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나라는 아마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국경을 맞대고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 국경선을 경계로 서로 다른 모습의 풍경이 펼쳐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 쪽은 군사 부분을 필두로 하여서 전후 복구 과정에서 수많은 서방의 제도와 문화들이 유입될 것이다.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는 어쩌면 상트페테르부르크처럼 근대화와 서구화의 상징적인 도시가 될지도 모르겠다. 반면 러시아는 사뭇 다른 풍경이 보일 것이다. 러시아의 대통령궁인 크렘린의 성벽이 더더욱 두터워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러한 두 나라의 결정 또한 일종의 페레스트로이카일 것이다. 소련이라는 타협점으로부터 벗어나서 우크라이나는 서방으로서, 러시아는 동방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정한다. 러시아제국과 소련을 거치며 오랜 세월동안 내재하던 갈등을 이렇게 상반된 두 나라로서 분리한다. 그리고 이것을 바라보는 우리들은 1990년의 자하 교지 기사의 말미와 같이 그들의 실천의 결과를 기다린다. 33년 전의 사람들과 지금의 우리는 아마도 비슷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것이 부디 작년에 타계한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처럼 실패하지 않기를, 소련의 혁명가였던 트로츠키의 말 따라 그 땅의 사람들이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가기를, 그런 시대가 오기를 기원할 뿐이다.
[참고자료]
김광동.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와 사회주의의 개혁". 상명대학교자하교지편집위원회 자하 23호 (1990): 40-52.
메인사진 _ 작가@wiresto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