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호 대만은 일본에게 친구(親舊)인가, 을(乙)인가
202210058@sangmyung.kr 정기자 이소명
평소 “꼭 가보고 싶은 나라가 어딘가요?” 하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냉큼 “대만이요.”라고 대답한다. 대만에 대한 남다른 관심이나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재밌게 본 로맨스 영화들이 대만 영화였기 때문이다. 영화 ‘청설’ 속 거리에서 먹지만 든든해 보이는 고기 도시락이라던가, 영화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에서 볼 수 있는 따스하고 포근해 보이는 길거리를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는 그저 그런 소망이다. 나의 이런 단순한 대만 사랑을 알게 된 어머니가 하루는 내게 이런 질문을 던지셨다. “너 대만 역사는 제대로 알고 있니?” 이 질문 하나가 나의 뇌를 관통했고, 검색창에 ‘대만 역사’를 검색하게 했다. 대만과 중국에 대한 사실은 평소에도 익히 알고 있었기에 나의 시선을 끈 건 대만이 일제의 식민지였다는 내용이었다. 놀라운 사실에 검색창에 ‘대만 일본’을 자연스럽게 검색하였고, 현재에는 두 국가가 꽤 우호적인 듯한 헤드라인이 집중을 불러일으켰다.
- 일본-대만 반도체 동맹 본격화‥투자금도 '반반' - MBC 뉴스, 곽승규 기자.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인 TSMC가 22년 6월
일본 이바라키현 쓰쿠바시에서 연구개발센터를 설립하였다.
연구개발센터의 투자금 역시 대만과 일본 두 국가가 반씩 부담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현재 일본의 반도체 수요가 60% 이상을 차지한다는 점과 대만의 TSMC가 일본의 우수한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두 국가의 협력은 매우 매력적인 계약이다.
위 뉴스만 보아도 대만과 일본은 아주 친밀한 관계를 지닌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대만은 1895년부터 1945까지 50년간 일본의 식민지였다. 과거의 대한민국 역시 35년간 일본의 통치를 받았다. 그래서인지 한국인들은 스포츠 경기의 한일전만 해도 모두가 손을 모아 승리를 기도한다. 그런데 대만과 한국은 똑같이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받았으나, 명확히 다른 태도를 보인다. 의문을 유발하는 차이가 필자를 글 쓰게 만들었다.
어쩌다 대만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을까? 현재 일본의 부속 섬인 오키나와는 1800년대 당시 ‘일본’과 분리된 ‘류큐’ 왕국이었다. 1871년 류큐 왕국 주민들은 태풍에 피항하고자 대만에 발을 들였다가 대만 원주민에 의해 류큐인 54명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은 대만을 첫 번째 식민지 대상으로 삼고 있었기에 방법을 고안해 냈다. 우선 류큐를 먼저 침략하고, 대만 원주민에 의해 살해된 54명의 주민 역시 일본의 자국민이라 주장하는 것이었다. 일본은 이를 시행했고 ‘자국민 살해’라는 명분으로 대만까지 손에 넣게 되었다. 이로써 1895년 대만은 일본의 영토가 되었다.
이후 일본이 대만을 통치했던 방식은 대한제국 침략 당시의 방식과 명확한 차이가 드러난다. 일본은 대만을 침략하고 2년 동안 자유롭게 대만을 떠날 수 있도록 유예기간을 주었다. 대만은 이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으니, 이것이 싫다면 중국이나 다른 땅으로 떠날 기회를 제공한 것이었다. 식민 통치라는 이름에 비해 확실히 구속이 적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통치 방식뿐만 아니라 침략 당시 대만과 대한제국의 상황에도 차이가 존재했다. 대만은 왕이나 황제와 같은 통치자 개념이 부재했다. 대한제국은 일본에 의해 왕조가 멸망했다는 원한이 있었으나 대만은 이러한 원한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 때문인지 대만이 일본에 대항하는 독립운동은 대한제국 국민들의 행했던 독립운동에 비해 확연하게 미비했다.
일본의 대만 침략 과정과 그 당시 상황만 보아도 대만의 현 태도는 어느 정도 납득이 간다. 결정적으로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후, 중국에서는 내전이 발생하였는 이는 현 대만에 방대한 영향을 미친다. 중국 내에서는 국민당과 공산당 두 당이 집권을 위해 내전을 벌이는데 이에 패전한 장제스의 국민당은 대만으로 이전할 수밖에 없었다. 국민당은 대만에서 정부를 재건하기 위해 기존 대만에 거주하고 있었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극단적인 독재와 공포적인 통치로 국민들을 통제하고자 하였고, 이는 ‘대만 백색테러’로 이어진다. 대만에서는 약 30년간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민간인 약 20만 명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연속해서 두 개의 외부 집단의 지배를 받은 대만인들은 상대적 비교를 하게 된다. “차라리 일본 통치 시절이 나았어.”라며 말이다.
하지만 일본과 중국의 국민당 모두 악의를 가지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 타국의 자원을 약탈하고 타국에 아픔을 안겨준 것은 똑같다. 대만은 일본에 의해 발전이 되었지만, 이는 일본이 다른 나라로 쉽게 진출하고자 하는 경로이자 수탈의 수단이었다. 앞서 제시한 일본이 대만에 준 2년의 유예기간도 역시 일본의 입장에서는 무력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한 전략에 불과하였다. 일제강점기 시절 가장 비통한 사실 중 하나인 위안부와 관련된 피해자에는 대만 여성들이 있다. 그리고 대만 남성 역시 대한제국 남성과 같이 강제징집의 대상이었다. 한 나라의 정체성을 통제하는 황국신민화 정책 또한 대만에서 시행되었다. 대만어, 원주민 언어 사용을 통제하고 일본어 사용을 강제하였고 신사참배 역시 강요의 항목이었다. 일본에 대한 투쟁이 대한제국에 비해 적었던 것이지 대만이라고 해서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1915년 민간 신앙 종교인 ‘시라이안’을 신봉하는 1,200여 명의 한족이 일본을 대상으로 투쟁한 시라이안 사건이 있다. 본 사건은 일본군에 수적으로 열세였음에도 약 한 달간 대치를 이어갔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항복한 자는 물론이고 사건과 무관한 마을 주민들까지 학살한 것으로 파악된다. 정확한 수치 자료는 없으나, 아직도 대치 장소였던 타파니에는 수많은 유골이 발굴된다는 점에서 그 가혹함은 말로 이룰 수 없다. 1930년에는 일본 경관이 원주민 족장을 무시하며 발발한 우서 사건이 있었다. 일본 족장에게 원주민 족장이 포도주를 권유했고, 경관이 더럽다며 족장을 구타함으로 사건은 시작되었다. 원주민들은 일본인 100여 명을 살해했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 정부는 원주민 마을에 독가스를 살포하여 원주민 600여 명이 사망했다. 그 후에도 일본 정부는 원주민 200여 명을 집단 학살했다. 즉, 대한민국과 대만은 일본으로부터 같은 고통을 겪은 것이다.
한 대만인은 말했다. “일본에 통치를 받았던 시절, 대만은 국가로서 많은 발전을 이루어냈습니다. 그리고 무력 통치 시절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났어요.” 수많은 대만인 중 한 명의 발언일지 모르지만, 여러 자료를 찾아본 결과 대다수의 대만인은 이와 같은 생각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일본대만교류협회(日本台灣交流協會)가 22년 1월에 대만인 20~80세 남녀 1,068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2021년 대만인의 일본에 대한 감정’ 조사 결과 대만인들이 좋아하는 국가 1위로 일본(약 60%)이 차지했다.
대한민국의 국민인 필자로서는 대만인들의 정서를 이해하기가 몹시 어렵다. 일제강점기 시절 경복궁의 근정전의 시야를 가로막았던 조선 총독부는 해방 이후 1995년에 철거되었다. 해방 이후 철거까지 50년가량이 걸린 것인데 이마저도 왜 이렇게까지 시간이 걸린 것인지 의문스럽다. 하지만 대만총독부 건물은 여전히 대만 총통부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한 대만인은 말했다. “저는 일본을 싫어하지 않아요. 사이좋게 지내고 싶어요. 세계 평화는 제일 중요하잖아요.” 대만의 일본 사랑은 국민들 개개인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부의 공조 과시까지 이어진다. 실제 22년 3월 대만 총통인 차이잉원과 당시 일본의 총리 아베는 공개적으로 화상회의를 진행하며 두 국가의 협력을 이야기했다. 이 회의에서 차이 총통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자신의 일처럼 여긴다며 대만과 일본이 교류 협력을 강화해 역내의 평화 안정을 촉진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더불어 일방적 무력에 의한 주권 변경은 용납할 수 없다며 평화 안정의 중요성을 강조해준 일본에 감사하다는 뜻을 전했다. 대만의 국민도, 대표도 ‘평화’를 언급하며 일본을 옹호했다. 현재 대만에 대한 중국의 위협은 절정에 다다랐다. 22년 10월에 시행된 중국 20차 당 대회에서 시진핑 주석은 평화 통일을 위해 노력하겠지만 무력 사용을 포기하겠다는 뜻은 결코 아니라고 말했다. 시진핑의 발언대로 중국은 대만 침공을 위한 해안 무기 개발에 집념하고 있다. ‘하나의 중국’을 내세운 중국의 봉쇄 정책은 대만에게 큰 위협으로 다가오기에 다른 강대국인 일본을 지지하는 것이 하나의 해결책이었을 것이다. 이 해결책에는 단순 일본만이 아니라 미국도 연결되어 있다. 타이완 전쟁 발발 시, 미국의 원조를 받는다면 대만과 가까운 땅인 일본의 지원까지 기대할 수 있게 된다. 일본에는 미국의 함대도 주둔하고 있고, 미함대 출발 동시에 일본의 자위대도 함께 공조할 가능성까지 있다. 하지만 현재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역사를 잊은 듯한 태도를 보이는 대만이 과연 당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일개 대학생인 필자가 ‘이런 방법도 있었는데.’라며 어쭙잖게 발언할 사소한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일개 대학생인 나도 아는 것이 있다. 비겁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이 말의 근원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전 세계 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 박혀있다. 출처도 불분명한 말임에도 많은 세계인들이 기억한다는 것은 그만의 의미가 있고 일리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만인들은 이 명언을 놓친 채 살아가고 있다
<참고 문헌>
김소연,“대만 전쟁 대비”…일본, 육·해·공 자위대 통합사령부 신설 추진,한겨레,2022.10.30.,<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japan/1064894.html>“대만 사람들이 일본을 좋아하는 이유”, 유튜브 비디오, 6:12, 게시자 “딩글 dinggle”, 2019. 8. 16.,<https://www.youtube.com/watch?v=QNvICAAbdrc>
2021년대만인의일본에대한감정,일본대만교류협회(日本台灣交流協會),<https://www.koryu.or.jp/tw/>
연합뉴스,대만 차이잉원, 日 '막후실세' 아베와 화상대화…대중 공조 과시,2022.03.23.,<https://www.yna.co.kr/view/AKR20220323096400009>
이영희,“대만 침공 등 대비”…일본, 미군과 소통할 통합사령부 만든다,중앙일보,2022.10.31.,<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13464#home>
이장훈,TSMC 앞세운 대만의 질주, 올해 1인당 GDP 韓日 앞선다,주간동아,2022.10.31.,2022.10.31.,<https://weekly.donga.com/3/all/11/3729691/1>
현영준,바이든 "대만 침공 시 군사개입"‥일본 힘 키워 중국 대응,mbc 뉴스,2022.05.23.,<https://imnews.imbc.com/replay/2022/nwdesk/article/6371438_35744.html>
2021년대만인의일본에대한감정,일본대만교류협회(日本台灣交流協會),<https://www.koryu.or.jp/tw/>
메인사진 _ 蔡英文 Tsai Ing-wen,대만 총통 차이잉원 트위터,2022.03.22.,일본 총리 아베와 화상 대화를 나누는 대만 총통 차잉원의 모습,<https://twitter.com/iingwen/status/1506462361590194183?cxt=HHwWjoCjoanig-gpAAAA>